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절대 선이 우주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소망이 없고, 반면 절대 선이 우리를 다스린다면 우리는 매일 그 선의 원수가 되는 셈이고 다음날이라고 해서 사정이 나아질 기미가 없으므로 이 경우에도 역시 우리에겐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선 없이 살수도 없고 그 선과 더불어 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위안인 동시에 최고의 공포.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인 동시에 가장 피하고 싶은 존재. 그는 우리의 유일한 동맹자가 될 수 있는 존재지만, 우리는 스스로 그의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신이 회개할 일이 없다는 사람, 용서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기독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도덕률이라는 사실이 정말로 존재하고 그 법칙의 배후에 어떤 힘이 있고, 우리가 그 법을 어김으로써 그 힘과 잘못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기독교는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병들었다고 느껴야 의사의 말이 귀에 들어옵니다. 인간이 아무런 가망도 없는 처지에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비로소 기독교인들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

하나님과 경쟁하는 개념들

기독교는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 종교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우리가 늘 예상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우주를 제시한다면 저는 기독교를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부류의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예상과 맞지 않는 기묘한 비틀림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미숙한 철학들-지나치게 단순한 답들-은 다 제쳐두기로 합시다. 문제 자체가 단순하지 않고 답 또한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원론(선과 악이 태초부터 있었고 그것은 독립적인 두 존재)은 기독교 다음으로 분별력 있는 관점이라고 보이지만 함정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만든 것도 아니고 하나님으로 자처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아마 두 힘은 각각 자기가 선하며 상대가 악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둘 중에 하나는 미움과 잔인성을 좋아하고 다른 하나는 사랑과 자비를 좋아하는데 두 힘 모두 자기가 선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 개의 기준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 두 힘을 제외한 제 3의 존재, 즉 두 힘 중에 하나는 거기에 부합되지만 다른 하나는 부합되지 않는 어떤 법칙 내지 기준 또는 규칙을 우주에 끌어 들이는 셈이 됩니다. 그 기준 내지는 그 기준을 만든 존재는 그 두 힘보다 오래 전에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고, 더 높은 곳에 있을 것이며 그야말로 하나님일 것입니다.

악한 힘이 악해지려면, 먼저 선한 것을 원하고 그 다음에 잘못된 방식으로 그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충동을 왜곡시키려면 먼저 좋은 충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악하다는 것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악은 선한 힘이 다스리는 세상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는 선한 힘에 의해 창조되었거나 두 힘 모두의 너머에 있는 어떤 힘에 의해 창조된 것입니다.

이제 기독교가 악마를 타락한 천사라고 말해 온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이것은 악이 원형이 아니라 원형에 기생하는 것임을 깊이 인식한 데서 나온 말입니다. 악이 악을 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선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이원론은 잘못된 것입니다.

기독교도 이원론에 가깝지만, 이원론은 아닙니다. 어두운 권세는 일종의 반란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반역자들에게 일부 점령당했다고 가정합니다. 적들의 엄령지역, 이것이 현재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충격적인 갈림길

악한 권세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맞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겁니까? 그렇지 않은 것입니까? 만약 일치한다면 하나님은 이상한 분이 되고 맙니다. 반면에 일치하지 않는다면 절대적 권세를 가진 존재의 뜻에 반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를 창조하셨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옳은 일을 할 수도 있고 그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자유 의지를 가졌으면서도 그릇 행할 가능성은 전혀 없는 존재를 상상하는 이들도 있지만 저로서는 그런 존재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선해질 수 있는 의지가 있다면 악해질 수 있는 의지도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나요?

하나님이 가장 고등한 피조물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행복은 사랑과 즐거움의 절정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며 이웃과 연합하는 데서 생겨나는 행복으로서 거기에 비하면 지상에서 남녀가 나누는 사랑은 우유처럼 싱거운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좋은 재료일수록 부패하기 쉽습니다. 어두운 권세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다라는 가망 없는 시도로부터 우리가 인간의 역사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이 나왔습니다.

그러한 시도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을 넣어야 달릴 수 있도록 우리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스스로 우리 영혼이 연소시킬 연료가 되시고 우리 영혼이 먹을 음식이 되신 것입니다. 다른 연료나 음식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상관 없는 행복이나 평화를 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평화나 행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미치광이거나 그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당신은 예수를 바보로 여겨 입을 틀어 막을 수도 있고 악마로 여겨 침을 뱉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이요, 주님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니 어쩌니 하는 선심성 헛소리에는 편승하지 맙시다. 그는 우리에게 그럴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그럴 여지를 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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